항우와 유방중 누가 더 뛰어난 경영자인가? 업로드
☆ 項羽(항우)과 劉邦(유방) - 전통중국의 人物典型(인물전형)
항우와 유방은 중국문화에서 대조적인 인물전형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역사는 귀족적이며 기선을 제압했던 저돌적인 항우를 미천한 출신이자 후발주자였으며 타협적인 유방이 복속시키는 것으로 우열을 가려주었다.
항우는 기원전 232년 楚(초)나라 귀족의 후예로 태어났다. 진승과 오광의 농민운동으로 시작된 秦末(진말)의 혼란기를 패권장악의 호기로 파악한 그는 숙부와 함께 기병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西楚 王(서초패왕)이라 불렀다.
반면 기원전 256년 출생한 유방은 미천한 사회적 신분에서 출발했지만 당시의 명망 높던 呂公(여공)의 딸과 결혼하여 신분적 열세를 만회하고자 노력했다. 그가 진제국에 대항하여 기병했을 때, 그는 항우와 연합했지만 상대적인 병력열세 때문에 항우와는 거의 주종적인 관계를 맺었다. 항우의 40만 대군에 비해 고작 10만명의 군사를 확보하는데 그쳤던 유방은 항우에게 일단 천하패권을 양보했다. 그러나 여기서 두 사람간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항우의 무원칙적인 分封(분봉)과 영토배정은 함께 봉기했던 제후들의 불만을 샀다. 특히 척박한 지역을 분봉받은 유방의 불만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마침내 우방은 불만세력을 규합하여 항우에게 정면 도전했다. 이 도전은 구귀족을 대표하는 항우집단과 신흥세력을 대표하는 유방집단의 싸움으로 발전하여 이른바 漢楚(한초)쟁패가 펼쳐졌다. 약 5년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기원전 202년 유방은 항우를 물리쳤으며, 이 때 항우는 虞美人(우미인)과 함께 도피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방이 세운 한제국은 중국의 다시 통일하고, 그 왕실은 4백년 이상 유지됐다. 유방의 궁극적 승리는 항우와는 달리 인재등용을 중시하고 백성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펼침으로써 가능했다. 그의 주변에는 蕭何(소하), 張良(장량), 韓信(한신)등 名臣良將(명신량장)이 들끓었다. 반면 항우는 독단적이고 민심의 동향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반의 승리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최후의 승리를 거둔 유방은 기원전 195년 생을 마쳤다.
-인터넷사이트 인물로본 중국역사일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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